Johannes Kepler and
the New Astronomy [번역]
by James R. Voelkel
"그의 주된 활동 영역과 연구 결과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정확성을 요구하는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가지고 인류지식을 풍성하고 깊게 만들어준 사람들 가운데, 케플러 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동정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아름다운 인격이었으리라. 그의 성품의 고결함은 그에게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 주었고, 그가 인생속에서 겪어야 했던 많은 불운들은, 많은 이들의 동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비밀스런 자연과의 연합은 저 우주너머에 있는, 고도의 신중함이 요구되는 자연과학이 제공하는,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이들 모두는 마음속에 케플러를 향한 깊은 존경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든 한번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신비스런 마법의 구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올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Max Casper, KeplerChapter 1. The Comet1577년 출현한 혜성의 모습을 담은 목판화,
이것을 만든 목판화가는 혜성을 스케치하고 있는
자기모습을 그림의 중앙에 집어넣었다.
A.D. 1577년, 혜성 하나가 나타났다. 아마도 그 혜성은 인류역사에 있어 가장 눈부시게 빛났던 혜성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혜성의 머리는 주위의 어떤 별보다도 밝게 빛났고, 그것의 꼬리는 보름달 크기의 50배에 가까운 길이로 밤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혜성은 이렇듯 신비롭게 하늘을 감싸면서 유럽 전역에서 수 많은 유럽인들 사이에 열광적인 관심과 열띤 토론을 불러 일으켰다. 남부 독일 깊숙한 곳에 위치한 뷔르탬버그(Wurttemberg)라는 도시에 사는 카타리나 케플러(Katharina Kepler)도 이 엄청난 광경을 보기 위하여, 다섯 살난 그녀의 아들, 요하네스(Johannes)를 데리고 레온버그(Leonberg)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으로 향했다. 시력이 약하여 밤이면 모든 것이 더욱 흐릿하게 보였던 탓에, 이 놀라운 혜성의 장관은 어린 케플러에게 그다지 큰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하지만 케플러는, 힘들고 불우하게 보내왔던 어린 시절 속에서, 그날 밤 보았던 엄마의 자상한 모습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간, 저 멀리 북쪽 덴마크령의 한 작은 섬에서는, 어느 촉망받는 젊은 귀족 하나가 그 혜성을 자세히 관측하기 위하여, 그당시 세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천문 관측소를 짓고 있었다.
하늘은 대부분의 경우 늘 한결같고, 평화로와 보인다. 이렇게 잠잠해 보이는 하늘에, 혜성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출현한다. 그러하기에 혜성의 출현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무언가 좋지 않은 변화를 동반할 불길한 징조로서 받아들여졌다. 만일 이 징조의 크기나 밝기가 어떠한 사건의 심각성의 정도와 연관이 있다면, 지금 이 혜성이 암시하는 다가올 변화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황제나, 터키의 술탄의 갑작스런 죽음, 혹은 심지어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혜성의 출현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변화를 예고했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수천명의 구경꾼들이, 밤 하늘에 갑자기 출현하여 의미심장하게 빛나는 정체 불명의 천체를 멍하니 바라보며 겁에 질려있을 때, 이곳 저곳에서는 숙련된 천문학자들이, 이 불청객에 대하여 조심스럽고 정밀한 관측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관측은 인간의 사고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바야흐로 과학 혁명의 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엄마 손에 이끌려 언덕위에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하품을 하고 있었던 그 어린 소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중 한 사람이 될 것이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 오후 2시 30분, Weil der Stadt라 불리는 어느 작은 도시에 있는, 그의 할아버지 세발드(Sebald)의 작지만 아늑한 집에서 태어났다. 케플러는 그의 부모에게 첫째 아이였고,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케플러가 태어날 때까지도 여전히 독립하지 못한채 그의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케플러 가문은 한때 잘 나가던 상류층이었지만 이젠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수 세대전, A.D. 1433년에는 케플러의 고조할아버지의 증조부되시던 분이 군에 있을적에 황제 Sigismund에 의하여 그 용맹함을 인정받아 기사의 신분을 수여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때 이후로 케플러가문은 점차 황제를 보필하는 일에서 멀어져갔고, 그들의 귀족성은 자연스럽게 상실되어져, 결국엔 제조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중산층 계급이 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짐에 따라 케플러가는 이 따분하고 자그마한 시골도시 Weil der Stadt로 이사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케플러의 집안은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선조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기사 갑옷을 간직하고 있었고, 케플러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군에 있으면서, 황제 Charles V세와 그의 후계자들로부터 칭송받은 이야기들을 늘 자랑스러워 했다.
그들이 한때 누렸던 가문의 영광에는 비교할 수 는 없으나, 케플러 집안은 그래도 여전히 Weil der Stadt에서 어느 정도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홍조가 도는 살찐 얼굴에 멋드러진 턱수염을 기르고, 늘 단정하고 수려한 옷을 입었던 할아버지, Sebald는 케플러가 테어났을 때 이미 십년 째 그 도시의 시장을 역임해오고 있었다. 그가 시장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특별히 케플러 가문이 그곳 Weil der Stadt에서 소수의 프로테스탄트 커뮤니티에 속해 있었던 점을 고려했을때, 그들 집안이 여전히 그 지역 사회에서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반영해준다. 지도자로서 Sebald는 중재자라기 보다는 독재자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언제나 이성적이였고 믿을만 한 것이 었기 때문에 지역사회는 그를 지도자로서 신뢰했다. 어린 케플러는 엄하고, 쉽게 벌컥 화를 내는 성격의 할아버지 Sebald 밑에서 자주 맞고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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